2009년 첫 포스팅.
아침 용산 철거민 사망 기사를 접하고 할 말을 잃었다. 죽음앞에서도 양비론을 들이대는 객관적,인 보도양태. 역하다.
남미 여행 중에 대학 선배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카페에 올라온 후배 구속의 글을 읽고 망연했다. 그리곤 글을 올린 선배에게 쪽지를 보내 후배 주소를 알았다. 면회를 다녀온 선배 왈, '애가 수배 생활을 오래해서 마음 고생을 많이 했는데 차라리 거기서 쉬니까 지금은 편한 것 같더라.' 나는 이래서 대학에서 만난 모든 이들이 징글맞으면서도 좋다. 지금은 편한 것 같더라,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한 뜸의 감각. 편지를 보내기 전 쌀이 먹고 싶었다. Lima에서 만난 H에게 오늘을 풀풀 날리는 이곳 쌀 말고 찰진 쌀이 먹고 싶어요,라고 얘기를 하고선 값도 비싼 스시집에 가서 찰진 흰쌀로 만든 초밥을 먹고서 한국으로 엽서를 부쳤다. 다만 이름으로는 도착하기 쉽지않을 그곳으로 7번 J의 이름을 달아서. 그러고도 허기는 가시지 않았다. 구치소로 보내는 관광 엽서. 그리고서 아르헨티나 땅끝에서 그녀에게 한장의 관광 엽서를 더 보냈다.
97년부터 98년까지 내가 속한 과에는 4명의 선배가 구치소에 다녀 왔다. 그땐 무언가 울컥한 것이 목구멍과 가슴 사이를 꽉 메운듯 해서 면회를 다녀와도 체한 것 같은 기분만 들었는데 먼 남미 땅에서 엽서를 쓰다 그게 무언지 알듯 했다. 그리곤 그녀에게 '니가 왜 그곳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썼다. 아마 바로 이 느낌일게다. 10년 전엔 왜,라는 생각보다 어떻게 지내는지 겨우 물었다면 지금은 왜란 생각이 머리부터 내장 구석까지 나를 분노케 한다. 분노의 끝은 허망함과 자괴감. 관광 엽서나 보내는 내 꼴이란......실형을 받을 수도 있다는 선배의 말이 걸리지만서도 집행유예로 끝난다면 한국에 돌아갈 때 즈음이면 J도 다시 세상으로 나오겠지. 그녀를 만나지 않은 근 오륙년의 시간들이 있기에 다시 부러 연락해서 만나지는 않겠지만 그때까지 몸도 마음도 조금만 다치기를 바랄 뿐이다.
남미에서 돌아온 후 다시 싼 짐을 들고 남아공 동북부와 모잠비크에 다녀왔다. 그리고서 되돌아 온 케이프타운. 역시나 이튿날부터 시작되는 알레르기에 지금도 감기 환자처럼 훌쩍대고 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곳에서의 휴가. 허나 곧 일상의 이름으로 다시 시작해야할 때가 곧, 곧 있지 않을까. 일상. 참 좋지. 그 무엇도 덮어버리는 그 이름. 크리스토 자바체프의 포장처럼.